
거슬리던 집안 물건을 싸그리 정리해도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았다. 혓바닥이 구멍 난 잇몸에 닿을 때마다 밀려오는 찌릿함에 몸서리쳤다. 피닉스도 사랑니라는 게 자라기 시작했을까. 피닉스도 이래서 머리를 자꾸만 붙잡았던 걸까. 걔도 나만큼 아팠을까. 혀를 깨무는 노력에도 잡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옷을 여러 겹 껴입었다. 어그 대신 낡은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그리고 무작정 달렸다. 찬 바람에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에도 멈추지 않았다. 호흡 망가진 목구멍에선 피 맛이 났다. 난 멈추지 않고 달려 숨이 헐떡거릴 즈음에야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어딘가에 나의 목적지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곤 했기에. 달리기는 필터 갈듯 고인 감정 빼내고 상쾌한 마음 채우는 나만의 수단이었다.
순식간에 지나쳐가는 눈 쌓인 나무들, 무표정인 용들. 따라잡지 못해 먼저 뻗어나가는 지하철. 아무리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강변. 혀끝이 바짝 말라 무릎에 손 집고 헐떡이다 고개를 들면, 일렁이는 윤슬에 눈 뜨지 못할 만큼 반짞이는,
"피닉스."
왜인지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듯한 피닉스가 있었다. 밭은 숨 몰아쉰 탓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네가 있을 줄은 몰랐어. 나 너 찾으러 온 거 아니야. 지금 더 걸을 힘이 없어서 잠시 앉는 거야. 피닉스는 쪼그려 모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서 고개만 끄덕였다.
"아깐 미안했어. 너무 막무가내였어, 내가."
"앞으론 사과 하지 말고 저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니니까 물가에 내놓은 애 취급하지도 마요."
"그치만 너는 어린....., 알겠어. 네 말 들어야지 뭐. 나는 똥개니까."
내 호흡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나도 늙었는갑다, 원래 심장 벌렁거려도 금방 템포 찾았는데 이젠 한번 뛰기 시작하니까 숨넘어가겠어. 건강검진 결과가 썩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지, 나 크럭스에서 쫓겨날 뻔. 어색함 풀어보려는 내 시도에도 피닉스는 손바닥으로 제 눈자위만 꾹꾹 눌러댔다. 그러다 대뜸 사과했다.
"미안해요."
"응?"
"미안하다구요."
용들은 저보고 목적을 갖고 태어났으니 항상 책임감을 가지고 살랬어요. 듣고 배운 게 그것뿐이라 모두가 목적 하나씩 손에 쥐고 태어난 줄 알았어요. 그래서 솔직히 파이어씨가 목적 그딴 거 없다고 했을 때 이해 하나도 못했어요.
멍청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원래 크럭스에서 자란 애들이 다 그래요. 파이어씨 덕분에 배운 거예요. 이건 내가 원해서 가진 책임감이 아니라는 거. 그러다 보니 점점 제가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더라구요. 혹시라도 백신이 만들어지면 내 목적은 사라지는 건데, 그럼 그 후의 나에겐 뭐가 남는 거지? 제 손엔 어느새 무책임한 책임감만 남아버린 거예요.
파이어씨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우리 세대엔 어쩌면 해결하지 못할 난제로 남을 수도 있겠구나. 그치만 그래도 괜찮겠구나. 이게 언제까지 이어질 지도 모르고, 내가 언제까지 더 살 수 있을 지도 모르고, 당장 저 요트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고, 어차피 이 세상은 모르는 것 투성인데 그 속에서도 나는 충분한 노력을 다 했으니까. 사는 이유도 모른 채로 다들 잘 사니까.
저는, 만약에 백신이 만들어지고 나면 저 요트보다 열 배는 더 큰 요트 타고 망망대해에 동동 떠다니죠 뭐. 목적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새 목표가 생긴 거예요, 저에겐.
"팬데믹 끝나고도 나 따라다니면서 잔소리 하겠다는 거야?"
"네. 파이어씨 저 없으면 무대뽀로 살 거 뻔하니까."
"그래라, 그럼 곧 새해니까 소망으로 빌면 되겠네."
"파이어씨는 무슨 소망 빌래요?"
"난 아직 모르겠어. 고민해봐야겠다, 거창하고 중요한 소망으로 빌고 싶어서."
"취업 성공 뭐 그런 거요?"
"그건 하나도 안 거창한데."
"파이어씨 스펙에 바로 취업이 되는 거면 완전 거창하죠."
"맞는 말이네."
피닉스의 무릎을 찰싹 때렸다. 피닉스는 깔깔대며 내 손을 피해 대교 밑으로 도망 다녔다. 맞바람이 불어 둘 다 앞이 보이지 않아 따가워하며 허공에 손만 휘적였다.
이거 봐, 너 지금 진짜 웃겨.
난 카메라 켜고서 피닉스를 찍었다.
나만 볼게, 나만. 아 알겠어, 가만히 있으면 지울게 진짜.
뺏으러 달려드는 손길과 뺏기지 않으려는 손길이 이리저리 뒤섞였다. 스치는 두 손의 찬 온도가 전해졌다. 쉽사리 진정되지 않던 웃음은 겨울바람을 잔뜩 들이키게 만들었고 이는 곧장 기침으로 이어졌다. 추위를 많이 탄다던 피닉스의 목에서도 뜨거운 기침과 웃음이 뒤섞여 연달아 나왔다.
고민이라곤 전부 잊은 애처럼 맑은 표정. 칼바람에 두 뺨은 발갛게 칠해진 지 오래였다. 진정하고 집으로 돌아가자 이제.
아주 지독한 감기에 걸린 것 같아. 너도,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