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물어가는 십이월의 마지막 하루. 차분히 일 년을 마무리하는 용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연말 분위기.
그러나 나는 고개를 꺾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고층 건물 크럭스 주변을 돌았다. 아파트가 적당히 많아야지 여기서 어떻게 찾아. 꽁꽁 언 손엔 받지 않는 전화 들고서. 모자란 숨을 모아 뛰려니 당장 여기서 쓰러진대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그치만 난 어떻게든 가야겠어.
대로변에 멈춰 서서 목울대 쥐고 기침한 후에야 굴다리를 지났다. 저무는 햇빛을 머금고 금빛으로 반짝이는 한강. 산책로 따라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 피닉스. 추위에 맞서다 누렇게 물들어버린 드넓은 잔디밭에 쓰러지듯 누웠다. 찬바람에 죽어가는 핸드폰으로 다시 전화를 걸어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된다는 메시지 뿐이다.
이거 들으면 연락 좀 해줘. 이상 증후 생기면 연락 하라며. 나 너무 아파. 나 이젠 진짜로 네가 필요해 피닉스.
늦은 밤도 아닌데 졸음이 밀려왔다. 겨울 날씨와 강가 따라 불어오는 바람에도 간간히 기침만 나올 뿐 추위에 떨진 않았다. 대자로 드러누워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는 새들과 쏟아질 것 같은 구름을 눈에 담았다.
이제야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망할 세상에 나를 왜 낳았냐며 애꿎은 엄마를 온갖 원망의 대상으로 삼았던 지난 날들. 사랑의 전부도 모른 채로 사랑에 실망했던 과거의 어린 나. 이제 와 후회하기엔 늦은 것 같지만 그 모든 날들을 뼈저리게 후회해. 이제야 전하고 싶어, 날 사랑으로 낳아줘서 너무 고맙다고. 남은 미련도 없어. 난 지금도 나쁘지 않게 행복하거든.
그치만 날 부르는 피닉스의 목소리만 상상해도 눈물이 나는 이유는 왜일까.
"파이어씨!"
헛것을 들었나 눈물 고인 눈을 벅벅 닦아내니 맞춰지는 초점 그 가운데엔 온 힘을 다해 내게로 달려오는 피닉스가 있었다. 발개진 뺨을 하고서 가쁜 호흡 몰아쉬면서도 눈은 잔뜩 화가 난 채로. 왜 또 화가 나 있어, 너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데요."
"여기에 네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 너 찾으러 왔단 말이야."
"그걸 왜 멋대로 판단하고 오냐구요! 내가 안 왔으면 어쩌려고 이래?"
"그럼 어쩔 수 없는 일이 됐겠지 뭐."
장난이고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게 여기밖에 없어서.
피닉스는 대꾸 대신 숨 고르며 내 옆에 털썩 앉았다. 날씨에 맞지 않게 얇은 겉옷만 껴입었길래 내 패딩이라도 벗어젖히자 극구 만류했다.
"피닉스."
"다 알고 왔으니까 조용히 해요, 하여간 파이어씨 진짜 말 안 들어. 미워 죽겠어."
"미안, 나 얼른 숨만 고르고 힘 내서 집 갈게. 그러니까 너도 일단 좀 쉬어, 힘들겠다."
피닉스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쭉 뻗은 내 팔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서 드러누웠다. 미안해, 똥개 주제에 주인 말 안 들어서.
"나 너 때문에 너무 많이 아프단 말이야. 그래서 이기적이지만 네가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도 저는 파이어씨 사랑 안 해요. 못 해."
"그래 다행이다. 괜찮아."
그 말을 듣고 싶었어, 진심이야. 나는 너 아픈 거 보기 싫어.
강물에 반사되는 금빛 세계 받으며 두 눈에 태양을 가득 품은 피닉스가 젖은 낯으로 웃었다.
".....아니. 하나도 안 괜찮아. 사실 거짓말이에요. 내 말은 다 거짓말이란 말이야."
이윽고 가장 원했으나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피닉스의 외침이 터져 나온다.
나는 전부터 파이어씨 사랑했는데. 나는 그래도 괜찮은데 혹시 파이어씨도 괜히 나를 사랑하게 돼서 아플까 봐. 그래서 내가 어떻게든 피하려고 노력했는데. 파이어씨 안 보려고 도망 다녔는데 쉽지 않더라. 파이어씨를 보고 있으면 아파서 서 있기 힘든데 막상 파이어씨를 안 보려니까 죽을 것 같이 아파서. 파이어씨랑 관련된 온갖 일들이 종일 신경 쓰여서. 가끔은 꿈에서도 파이어씨가 나와서. 그래서 왔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파이어씨는 나만큼 아프지 않길 바라는 동시에 파이어씨도 많이 아프길 바랐어요. 나만 아픈 게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파이어씨가 그동안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다 허울 뿐인 가짜였다고. 파이어씨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은 나라고. 그걸 확인하고 싶었어.
"사랑 그딴 거 평생 안 할 거라며. 근데 왜 지금 이렇게 골골대는데. 대체 왜, 피닉스 네가 날 왜."
"이유 같은 거 없는데 어떡해요. 솔직히 파이어씨를 왜 사랑하게 됐는지 이유조차도,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래....., 모르겠으면 굳이 증명하려 들지 마. 증명 못하면 뭐 어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귀신이나 외계인도 다들 잘만 믿던데. 뭗느 진심으로 믿으면 그게 사실이 되고 세상이 돼. 그래서 나도 네 마음 진심으로 믿으려고. 나 지금 완전 피닉스 맹신도야."
결국 나는 면역자도, 난세의 영웅도 아니었다.
나의 고백은 절대 자살이 아니야. 사랑을 그저 사랑으로 온전히 받아들인 것뿐.
눈 질끈 감고 큰 숨을 들이마셨다. 일어날 힘은 커녕 이제는 목구멍이 부어올라 목소리조차 잘 나오지 않았다. 나의 말이 피닉스의 귓가에 닿을 수 있도록 옆으로 돌아누워 세게 끌어안았다. 피닉스의 뜨거운 몸과 곧 터질 것처럼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수평선에 걸친 태양이 주홍빛으로 물들인 하늘에선 눈발이 흩날렸다.
함박눈이었다.
피부에 닿아도 오랫동안 녹지 않을.
눈은 마치 우리에게 이불을 덮어주듯 소복이 쌓여갔다.
실제로 드러누워 보니 알겠어, 겨울이란 이토록 따뜻하고도 가장 행복한 계절이었다는 것을.
사랑은 불치병이 맞아.
면역도 치료법도 없어.
당연한 거야, 애초부터 사랑엔 이유가 없으니까.
우린 감염자도 아니고 동반자살 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사랑하는 거야. 그게 다야.
피닉스, 난 사랑을 너로 배웠어.
그 질병의 원인이 뭐였는진 백 년 후의 너에게 배울게.
사랑해.
Learn to you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