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결과에는 그 결과에 이르게 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 훌훌 털어내어 잊어버리지 못하고 엔젤을 더 좋아하게 된 이유란 것을 나열하자면 밑도 끝도 없다. 아무리 바꾸려고 해도 마치 서식 오류가 난 셀과 같이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취향 탓에 옷, 신발, 가방이라면 징그러울만치 사서 쟁여놓고도 쉽게 질려 또 백화점을 들락거리는 고신에게 사랑은 그런 취향과는 무관했던 모양이었다.
엔젤을 좋아하는 이유 같은 건 취향을 타지 않는 듯 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오래 좋아한 것은 없었기에 감히 잃을 자신이 없었다. 하나 고신에게 다행인 것이 있다면 추파를 던지는 이성에게 유독 선을 긋고 차가운 탓에 엔젤은 그 흔한 연애 한 번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고백과 관계없이 엔젤을 잃는 일은 엔젤의 연애뿐이었으니까.
엔젤의 연애를 생각하자니 누군가 고신의 멱살을 잡아 지옥불로 던져 넣는 것 같이 괴로운 심정이 되곤 했다. 그 지옥불 근처에서 알짱대며 고신에게 와보라고 손짓을 하는 용이 엔젤 다음으로 가깝게 지내는 시타엘일 줄이야.
술잔을 넘치게 따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시타엘이 취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술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취한 남자를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탓에 술잔을 뺏은 것이었다. 고신이 잔을 막자 시타엘이 자못 진지하게 기울어져 가는 몸을 바로 세우며 제 뺨을 탁탁 손바닥으로 휘갈겼다.
뭐하는 거야, 미친놈. 고신이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담긴 어묵탕 안에 숟가락을 휘저으며 읊조리자 시타엘이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둘이서 한 잔 하자는 것도 이상했고 자기가 계산 한다고 하는 것도 솔직히 좀 웃겼다.
시타엘은 학교에서 알게 된 남자들 중 그나마 믿음직스러운 남자동생이었다. 눈알에 힘이 탁 풀린 것이 정말 단단히 취한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뭔가 고민 중인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그런 눈으로 누군가를 쳐다보는 건 좀 아무리 친하더라도 별로였다. 얼마 전까지 주구장창 연락을 해대던 선배하나를 떠올려보니 술을 마실 때면 저 비슷한 눈으로 그윽하게 누군가를 쳐다보곤 했다.
설마 시타엘이? 에이 그럴 리 없지, 생각하는데 시타엘이 또 별안간 제 뺨을 내리쳤다.
고신 : "야. 맞고 싶으면 나한테 부탁해. 남한테 맞아야 아파."
시타엘 : "형. 형은 누구 좋아한 적 없어?"
그건 고신이 제일 싫어하는 유형의 질문이었다. 저런 유형의 질문은 대개 어떠한 의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고신의 예감이 별로 좋지 않았다.
고신 : "없는데, 왜?"
시타엘 : "나는 엔젤 좋아하는데."
고신 : "...엔젤 좋아하는 애 한 둘이냐?"
시타엘 : "나는 진짜야."
지랄하네.
냄비 안을 휘젓던 고신의 숟가락이 뚝 멈췄다. 말꼬리에 뱉은 시타엘의 한숨에서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얼굴을 구긴 건 그 술 냄새 때문이 아니었는데 풀린 눈이 고신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느릿하게 합장하듯 손바닥을 모아서 맞춰 미안 미안, 형. 술 냄새 많이 나지? 하고 부정확한 발음으로 느리게 중얼거렸다. 고신이 던지듯 숟가락을 어묵탕 안에 빠지게 놓았다.
고신 : "뭐라고?"
시타엘 : "엔젤 좋아한다고, 엔젤."
잔뜩 늘어진 그 굵고 낮은 음성에 고신이 소름끼친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누굴 좋아한다고? 고신이 뺏은 잔 쪽으로 손을 뻗는 시타엘을 보며 고신은 시타엘의 앞에 놓은 소주병을 가로채 듯 가져와 병 채로 입안에 쏟아 부었다. 시타엘의 말을 듣고 있자니 취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병 째 들이킨 술의 효과 때문인지 충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순식간에 머리가 핑 돌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고신이 병나발을 불거나 말거나 시타엘은 고신 앞에 놓인 제 잔을 도로 가져가 남은 술을 탈탈 털었다. 고신 역시 시타엘이 그러거나 말거나 따져 묻듯이 되물은 거였다.
뭐라고? 누굴 좋아한다고?
경영학부 여신이라 불리면서 손에 꼽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고백을 받던 엔젤. 하다하다 술집 아르바이트생까지 쫓아 나와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통에 곤란해 했던 엔젤. 그것들을 거절하는 걸 고신과 함께 지켜봤던 시타엘이었다.
시타엘 : "내가 엔젤을 좋아한다고"
고신 : "도대체 왜, 언제부터?"
시타엘 : "몰라, 몰라. 형이 좀 도와줘. 형 엔젤이랑 친하잖아."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을 마친 시타엘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더니 탕 하고 소주병들을 넘어뜨리며 테이블 위로 뻗었다. 미친놈. 지가 언제부터 좋아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면서 뭘 누굴 좋아해?
고신 : "야. 나는 걔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입 밖으로 뱉어 본 적도 없는 그 말을 뱉어버리고 나자 거짓말처럼 가슴 속 엔젤에 대한 마음이 눈덩이마냥 커져버렸다. 그래서 고백이란 건 함부로 하면 안되는 것인가 보다. 그러나 시타엘은 언젠가는 엔젤에게 고백할 것이라는, 시타엘 정도라면 엔젤이 싫어할 것 같진 않다는, 그 생각을 기점으로 말도 안되는 상상들이 취기 속에 뒤엉켜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시작했다.
시타엘과 연애를 하는 엔젤을 떠올리다가 탕 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건 상상도 하기 싫다. 그냥 바라만 봐도 좋다고 생각했던 건 순 거짓말, 진짜 자기위로였나 보다. 다른 용과 연애를 하는 엔젤을 생각하니 가슴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상상만으로도 이런데 그게 현실이 되면 얼마나 아플까. 생각하니 취기가 오른 김에 미처 돌아버릴 것 같았다.
고신이 탁탁 엎드린 시타엘의 옆얼굴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일어나 임마. 뺨이 움찔거리고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신체감각은 반응이 오는데 정신은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럼 청각은 어떨까. 귓볼을 잡아당기자 눈썹이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고신 : "나쁜 새끼."
생각해보면 시타엘이 나쁠 건 없다. 엔젤을 좋아했던 남자가 한둘이었을까. 물론 그 중 질 안 좋은 놈들이 몇 있었겠지만 엔젤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쁜 새끼가 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유가 있는데 엔젤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쁜 새끼 소리 들을 시타엘을 내려 보고 있자니 고신은 답답해서 무슨 짓이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고신은 핸드폰을 들어 엔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틀에 한 번은 이유도 없이 전화를 걸어 아무 말이나 늘어놓아서 아마 이번에도 엔젤은 그런 별 이유 없이 대리 부르기 전 심심해서 전화를 했을 거라 여기고 전화를 받을 것이었다.
긴장되는 마음에 입을 꽉 깨물고 폰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스피커너머로 엔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신이 얼른 귀에 가져다 대자 엔젤이 의아스럽게 물었다.
엔젤 - 고신, 아직 시타엘이랑 있어? 뭐해?
시타엘과 연락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취기가 오르자 원래 하려고 머릿속으로 준비해둔 말들이 증발했다. 고신이 말이 없자 엔젤이 재차 고신? 고신, 하고 부르는 것이 들려왔다. 입을 열어버리면 좋아한다는 말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차마 그 말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엔젤은 전화를 끊지 않고 계속 들고 있었다. 연결된 상태로, 초단위로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화면으로 보였으니까.
엔젤, 엔젤. 하고 부르면 이어 좋아한다는 말이 뒤따를 것 같았다. 엔젤 하고 부르면 좋아한다는 말이 나오도록, 시타엘이 도화선에 불을 당긴 것이다.
고신 : "잘못 걸었어. 미안. 얼른 자라."
탄식 같은 한숨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끊긴 뒤 얼마 되지 않아 시타엘의 전화가 울리는 것이 고신의 귀에 들려왔다. 예감이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행동을 부추긴다. 남의 핸드폰 같은 거 훔쳐보는 취미는 없었는데 엎어진 시타엘의 휴대폰을 뒤집자 액정화면에 엔젤이라는 글자가 수신호처럼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눈 앞이 컴컴해졌다. 엔젤이라는 글자는 오래토록 시타엘의 폰에서 발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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