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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13

12
  • 조회수10
  • 작성일00:33






일 년이나 기다린 끝에 출고된 차라며 애지중지하며 관리하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뻥뻥 차댄 것이 문제였다. 가게를 나서고 차로 돌아왔을 때 분을 이기지 못하고 조수석 쪽 바퀴 휠을 걷어찼다. 얼마나 세게 걷어찼는지 충격을 받은 차에선 요란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고라는 것이 정지된 그 때 차키가 어디에 있는지 기억이 날 리 없었다.


용들이 길바닥에서 딱 봐도 비싼 차를 걷어차고 있는 술 취한 남자에게 손가락질 하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었고 그 덕분인지 한동안 주변을 시끄럽게 하는 바람에 겨우 정신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나왔던 건지 차례로 생각이 났다.


제 손목에 감긴 롤렉스 시계를 풀어주고 그걸 받은 시타엘의 얼굴을 쳤다. 시타엘이 넘어졌고 엔젤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봤다. 그리고 시타엘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시계를 주워 다시 엔젤에게 주었다. 



결혼 선물. 


그리고 끝. 



술기운이 완전히 휘발되고 나서 고신은 코트 안쪽 주머니에 있는 차 키를 꺼내 경보음을 꺼버렸다. 시간이 약이라던데 오히려 시간이 독이 된 것 같다.


분명 그 영상을 보기 전까지 고신은 엔젤을 잘 잊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끔 몰래 엔젤이 어떻게 지내는지 찾아보곤 했던 것은 끝나버린 것에 대한 약간의 미련이라고만 생가했지 마음이 아직도 남아있어서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영상이 업데이트 되었던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재생 버튼을 바로 누르지 않은 건 엔젤의 아이디 옆에 적힌 '프로포즈 받았당' 이라는 글 때문이었다. 그 단 한마디의 문장으로도 고신은 가슴이 아파와 차마 영상 같은 건 볼 염두가 나지 않았다. 


어플리케이션을 지우고 핸드폰을 꺼버렸다가 금세 고신이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면서 문제가 생겼다. 웃는 얼굴을 얼마나 상상했었는지. 영상을 얼마나 되풀이해서 봤던 건지 눈을 감아도 꽃을 들고 있는 엔젤의 얼굴이 보였다. 그 계정을 벗어나도 핸드폰을 꺼버려도, 눈을 감아도 엔젤의 얼굴이 떠오른다니 그제야 고신은 알 것 같았다. 


접어두는 것과 완전히 잊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구겨져 외면했던 엔젤에 대한 마음이 다시 풍선처럼 부풀어 는 것이 느껴졌다. 










발이 퉁퉁 부은 것을 감추느라 억지로 운동화에 끼워 넣은 발이 심상치가 않다. 브레이크를 밟는 내내 찌릿한 느낌이 드는 것이 신경 쓰였다. 병원을 먼저 가는 게 옳았지만 병원을 들렸다가 가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엔젤을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은 곳까지는 점심시간이라 차가 어느 정도 막힐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 시타엘뿐만 아니라 다른 동기들에게도 전화를 여러 번 받았다. 왜 그랬는지 설명하기 위해 핑계를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영원한 잠수를 택하기로 한지 몇 시간 되지 않아 엔젤에게 전화가 왔다. 이상하게도 엔젤의 전화는 거부 할 수 없었다. 


꽤 긴장될 줄 알았는데 밥 먹자는 말이 술술 나오는 것이 별로 조짐이 썩 좋진 않았지만 영원한 잠수를 위한 마지막 고백과 함께 빌어먹을 축의금을 롤렉스시계로 대체할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고신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고 핸들을 돌렸다. 핸들을 돌리는 손목도 시큰거려 오기 시작했다. 





하나, 고백을 한다. 좋아했었다고. 둘, 시계를 준다. 버리던지 팔아버리던지 알아서 하라고. 


고신은 건물 앞으로 차를 밀어 넣고 차 문 밖 스시집의 입구에서 서 있는 엔젤을 보며 읊조렸다. 



하나, 둘. 


왜 그랬냐고 물으면 바로 전하는 것이다. 



시동을 끄자 계기판의 모든 불이 꺼졌다. 엔젤은 고신의 차가 있는 쪽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아직도 아우디A6를 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 엠블럼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생각이 나 잠시 머리를 흔들었다. 그 진지한 눈동자와 축 쳐지던 양 쪽 눈썹 끝. 


어느새 엔젤의 시선이 고신의 차가 있는 쪽으로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룸미러로 자신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하나, 둘. 읊조리곤 차에서 내려 손을 흔들어 보였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밝은 곳에서 단 둘이 나란히 있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작정하고 멀어지려 하고 나서부턴 정말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자신에게 바뀌지 않았다고 뭐라고 하더니 엔젤 역시 그대로다. 정말 거의 바뀐 부분이 없다. 짧게 얼굴을 훑고 대충 주문을 하고 직원이 나가고 나니 엔젤이 대뜸 롤렉스를 꺼내 놓았다. 


작년에 이탈리아에서 샀던 시계가 저거였나. 깜빡하고 자진신고 하지 않아 세관통과 할 때 꽤 애를 먹은 기억이 난다. 세금 같은 건 아깝지 않지만 공항에서 붙잡혀서 시간을 축낸 게 짜증나서 다신 해외에서 뭘 사서 오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만든 시계가 저거였던가. 아버지께 건물 하나를 증여받은 직후에 이탈리아로 갔으니 아마 저 시계가 맞을 것이다.



고신이 빙긋 쳐다보고 있자 스윽 하고 엔젤이 고신쪽으로 시계를 더 밀었다. 뭐해? 안 가져가고? 라고 하는 듯.





엔젤 : "이 시계 비싸더라."


고신 : "나 원래 비싼 것만 하잖아."


엔젤 : "그래. 알지. 근데 우리는 이런 거 못해."



고신이 실소했다. 우리? 엔젤의 말에서 그런 낯간지러운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고신 : "우리? 아, 너랑 시타엘? 와 벌써 너네 그렇게 서로 세트처럼 합쳐서 부르기로 한 거냐?"


엔젤 : "어쨌든 이거 가져가. 이런 거 흘리고 다닐 용 진짜 너 밖에 없어."





고신의 아픔 같은 건 단박에 외면하고도 남을 만큼 단호했고 그걸 보는데 테이블 아래 손이 약간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손목이 시큰거리며 부어오른 발등도 저릿했다. 모든 감각이 죄다 아프다고 난리인데 나오는 건 웃음뿐이라니 고신은 믿을 수 없었다. 고신이 허탈하게 웃으니 엔젤의 시선이 테이블 쪽으로 떨어졌다. 그제야 고신은 조금 미간을 구겼다가 풀었다.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키느라 죽을 맛인데 시계를 가져가라며 정색하고 앉은 엔젤은 말이 없다. 철철 끓을 만큼 뜨거운 차에서 올라오는 김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치 꿈을 꾸는 듯 시야가 흐릿해지며 엔젤의 얼굴이 뿌옇게 보였다. 





고신 : "내가 취했어도 정확히 기억하는데, 이거 흘린 거 아니잖아. 너 준 걸로 기억하는데. 아, 좀 더 정확하게는 너랑 시타엘 한 세트한테 말이야."



힘주어 말하는 어조에 그만 비아냥이 섞여버렸다. 





엔젤 : "그러니까 왜 이걸 주냐고, 이 비싼 걸."


고신 : "왜, 주면 안 되냐? 이거 나한테는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야. 그리고 시타엘도 좋다고 받았잖아."


엔젤 : "걔는 장난이었지. 니가 먼저 장난쳤잖아. 우리 이거 안 받을 거라니까."





하, 또 우리라니.


겨우 웃음 지으려 했던 노력이 반복된 그 단어 앞에 굴복해버렸다. 고신은 댐이 방류될 때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물의 양을 떠올렸다. 마치 그런 댐의 수문이 개방이 된 듯 뭔가 고신의 마음속에서 탁 하고 잡아 놓았던 울분이 우르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그 기분에 압도된 고신은 표정관리 같은 건 잊은 채 그 말을 하는 엔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부정하고 싶었던 사실이 있었다. 엔젤을 사랑한다는 것 보다 더 고신을 견디기 힘들게 했던 것은 엔젤이 다른 누군가와 영원히 함께할 것이 미치도록 싫다는 것이었다. 행복한 모습을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은 노래가사에서나 나오는 개소리라 생각했다. 



또 우리라니. 차라리 엔젤이 찌르는 칼에 맞는 게 덜 아플 것 같다.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파왔다. 





고신 : "야, 엔젤."



낮게 부르자 엔젤의 눈빛이 약간 의아스럽다는 듯 변했다. 약간은 당황한 것 같다.



엔젤 : "왜?"


고신 : "너 자꾸 내 앞에서 우리 우리 할래?"


엔젤 : "왜 그래 진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구긴 채 말하는 엔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도저히 따져 묻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는데.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겨우 꾹 참아냈다. 



엔젤, 너 진짜 밉다.





고신 : "너 그거 죄야."


엔젤 : "무슨 죄? 시계 안 받은 죄 말하는 거면 그냥 그 죄 지을게. 알아, 너 돈 많은 거. 근데 이건 아니지. 이걸 어떻게 맏니, 우리가."


고신 : "와, 또 우리라고 하네."


엔젤 : "그럼 우리지. 이제 부부잖아."





차라리 주방에서 회칼 하나 받아와서 찌르지. 헛된 상상은 이제 웃음도 불러오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알면 그 말을 했던 걸 후회할까 싶어 급한 마음에 입을 뗐다가 다물었다. 죄라는 말에 반박이라도 하려는 듯 조금 날카롭게 말을 뱉은 엔젤의 얼굴이 조금 시간이 지나자 거짓말같이 슬픈 빛으로 변해버렸다. 마음이라도 읽은 건지 뭔지 아니면 고신 자신의 눈이 어떻게 잘못된 건지 퍽 후회하는 얼굴 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래, 부부 맞지. 


고신이 하, 하고 소리로만 웃자 엔젤이 두통이라도 느껴지는 지 이마를 감싸 쥐고 잠시 굳어 있더니 앞에 놓인 찻잔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분명히 김이 오르는 건 엔젤의 얼굴 앞일 텐데 습한 기운은 고신의 시야를 감싼다. 눈가가 따가웠고 습해서 엔젤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고신 : "너 진짜 나한테 그러면 안돼. 그건 죄라고."





입은 모래알을 삼킨 것처럼 까끌하고 목구멍은 돌멩이를 삼킨 것처럼 묵직해 침 한 방울 삼키는 것도 힘든데 계속 눈을 뜨고 있으려니 눈도 따가웠다. 차는 이미 식었을텐데 김이 오르는 듯 축축해진 눈가가 딱 한 번이라도 눈을 깜빡이면 이내 눈물이 되어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눈을 깜빡이지 않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럴수록 눈만 더 따갑고 그런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깜빡이지 않아도 눈물이 떨어질 만큼 고여 드는 것이었다. 


고신은 쪽팔리에 지금 이 상황에서 눈물을 보여야 하나 고민 주잉었는데 고맙게도 그 때 문이 열리면서 직원이 주문한 초밥을 들고 엔젤과 고신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테이블 위로 주문한 초밥을 내려놓으려 직원이 허리를 숙이며 잠시 시야에서 엔젤이 사라질 때, 그 순간 고신이 소매로 살짝 눈가를 찍어냈다. 마음을 좀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자꾸 안에서 울컥 거리며 쏟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게 눈물이든 고백이든 뭐였은 간데. 



엔젤이 느릿하게 젓가락을 드는 것이 보였지만 얼굴은 뭔가를 삼켜낼 기분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옛날엔 분명 순수하게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 이 마음은 변질된 마음이 아닐까. 책망을 하게 된다. 





엔젤 : "너 장난 그만하고 먹어, 배고프다며."





바보 같은 건 난데 왜 엔젤이 밉게 보일까. 고신이 이를 꽉 깨물고 턱에 힘을 주었다. 





고신 : "너 진짜 잔인하다, 엔젤."


엔젤 : "뭐래. 너 광어 좋아하잖아. 먹어, 얼른."





마주한 엔젤의 눈이 붉어진다. 꼭 다문 입은 결연해보였지만 무슨 생각인지 알 길 없는 눈망울은 많이 붉어진 채다. 살짝 떨리는 젓가락 끝이 의미 없이 테이블 위를 천천히 지났다. 딱 접시 위에 닿았을 때,





고신 : "나는 광어보다 너를 더 좋아해. 몰랐냐?"





생각보다 후련하지 않은 말로 엔젤을 꽁꽁 얼게 만들었다. 엔젤이 테이블 위로 젓가락을 든 채 정말 꽁꽁 얼어버렸다. 



뭐라고?


그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젓가락이 좀 전보다 더 심하게 떨리는 게 눈에 보여 그것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어느새 떨리는 팔을 오른손이 잡아 아래로 끌었다. 그렇게 당황할 일이긴 하지. 말하고 나면 좀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고신의 마음이 더 동요하기 시작했다. 



젠장,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엔젤 : "...너 이런 장난 그만 좀 해. 나,"





정말 이런 식이면 진짜 곤란한데. 예상대로 울컥하는 마음과 함께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울컥 한 것은 역시 눈물 뿐 아니었다. 





고신 : "아, 이런 식으로 말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말이 자꾸 막나가네. 미안한데 엔젤, 나 장난 아니야. 너는 이번에도 내가 장난이야, 하고 한 발 물러서줬으면 바랄 수도 있겠지만 나 장난 아니라고. 내 얼굴 봐. 이게 어딜 봐서 장난하는 애 얼굴이냐?"





딱 한 번 살짝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쪽팔리에 눈물이 더 빠르게 고여 들었다. 서러운 건지 슬픈 건지 모를 감정들이 눈물이 되어 가기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간신히 견디고 있던 고신의 감정컨트롤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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