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캔 스프레이로 주차금지라고 써져 있던 담벼락엔 저번에는 없던 붕괴 위험 이라는 글자가 추가 됐다. 그 글자를 써 넣은 것이 무색하게 바로 앞에 검은색 소나타가 주차 되어 있고 또 그게 무색하게 그 낮은 담벼락 위에 번고가 앉아 열심히 다리를 흔들었다.
무너지길 개뿔, '차대면 차주 죽인다.' 정도의 강력한 문구였다면 누가 차를 갖다 대지 않았을까 생각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다시 골목 끝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낮에도 좁고 으슥한 이 골목길은 빙고가 다니는 학교의 후문으로 이어져 있다. 때문에 질 안 좋은 애들이 삥 뜯으려고 많이 숨어 있다.
번고가 올 때마다 골목길엔 그런 질 안 좋은 애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 애들뿐만 아니라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며칠 전 빙고가 버스를 타기 위해 후문에서 이어진 이 길로 내려오다가 그 질이 안 좋은 애들과 시비가 붙어 인근에 파출소 까지 다녀온 일이 있었다. 딱 봐도 부잣집 딸내미처럼 하고 있으니 뭐라도 뜯어내려고 했던 것 같다. 물론 빙고가 다른 애들처럼 겁을 먹지도 않았을 것이고 순순히 달라는 걸 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쪽수로 밀어붙이려다 당황했겠지.
그 양아치 같은 애들 입장에선 여리 여리한 빙고가 금방이라도 겁을 먹고 가진 돈 다 꺼내놓고 거기에 메이커 가방 운동화 까지 다 내주고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꼬챙이처럼 큰 키로 꼿꼿하게 서서 내려다보며 서울말로 또박또박 '내가 왜 너희한테 돈을 줘야 되는데?' 라고 했었다면 아주 많이 당황했을 것이다.
그 당황스러움이 분노로 바뀌는 데까진 얼마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때리려고 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길을 지나던 다른 용이 그 애들과 빙고를 붙잡고 파출소로 넘겨서 일단락 됐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빙고는 좀 많이 다쳤을 지도 모른다고 팔에 든 멍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깡패 딸내미인데 그렇게 맞고 다니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말은 그리 하지 않았지만 그러고 다니는 게 걱정이 됐다. 이 좁은 샛길을 지나다닌다는 것이. 그런 일이 있는데 또 그렇게 다니는 것이. 저렇게 튀는 것도. 번고를 자꾸 걱정스럽게 한다.
번고는 담벼락 위에서 풀썩 뛰어 내려 체육복 엉덩이를 털었다. 지나가고도 남을 시간인데, 그냥 다른 애들처럼 정문으로 다니기로 한 건가. 그렇다면 다행이고.
번고가 체육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고개를 빼고 골목 끝을 골똘히 쳐다봤다. 얼마나 더 골똘히 쳐다봤을까, 익숙한 꼬챙이처럼 마른 몸이 그 골목 끝에서부터 오는 것이 번고의 눈에 보인다. 영어단어장을 펼친 채로 이 골목에서 있었던 안 좋은 일을 완전히 잊은 듯 나풀나풀 당당한 걸음으로. 입으로는 연신 영어 단어 같은 걸 읊어대며 앞은 어쩌다 한 번 씩 응시한 채 걷는다.
번고는 인기척 없이 그 담벼락 앞에 서서 가만히 다가오는 걸 쳐다봤다.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지. 진짜 파워 삼촌 말처럼 깡다구는 타고 나나보다. 번고가 그 앞에 있다는 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걷가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책을 아래로 내려놓고는 단어 같은 걸 상기시키려는 듯 입을 새처럼 우물거렸다.
번고는 웃음이 나려는 입 끝에 힘을 주었다. 저러고 다니니까 표적이 되지. 걱정이 되다가 그냥 쳐다보고 있으면 웃음이 난다. 왜 이렇게 웃음이 날까. 니 앞에 똑바로 안 볼래! 하고 소리쳐도 모자란데.
빙고가 걸을 때마다 자꾸 손을 꼼지락거리게 된다. 괜히 번고는 주머니 안의 손을 꼼지락거리며 천천히 따라가다가 겨우 빙고의 어깨를 잡았다. 그래도 앞 좀 보고 다니지. 그렇게 하고 다니면 또 양아치가 달라붙는데. 아니면 우리 아빠 깡패입니다, 하고 붙이고 다니던가.
놀라서 동그랗게 떠진 눈이 민망해 번고는 빙고의 가방끈을 잡아 당겼다. 괜히 비죽 웃음이 났지만 웃으면 놀린다고 또 흘길 거니까, 그건 싫다.
"니는 가방에 뭘 이래 많이 넣고 댕기노."
"책 넣고 다니지. 번고 너는 오늘도 학교 땡땡이 쳤어?"
"오늘 CR인가 뭔가 그거 한다고 일찍 보내줘서 왔다이가. 그래 맞아놓고 또 이 길로 댕기나."
"창문으로 가면 돌아가야 된단 말이야. 뭐야.. 그거 땜에 또 걱정돼서 온 거야?"
번고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이고, 아저씨가 또 함 가보라 안 하 더나. 그래서 왔지. 점점 얼굴은 붉어져가고 번고는 그럴 수록 고개를 더 세차게 저어댔다. 이럴 수록 더 이상하다고 생각 할텐데. 고개를 숙이는 것도 팔을 흔드는 것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서 번고는 얼른 빙고의 가방을 뺏어 들었다.
무거워 죽겠네.
다행히 빙고는 번고의 얼굴이 붉어진 것 까진 보지 못한 것 같다. 픽 바라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그 옆모습을 멍하게 쳐다보다가 빙고가 다시 번고를 쳐다보았을 때 괜히 급하게 고개를 돌리며 담벼락 앞에 주차 해둔 소나타를 가리켰다.
"빙고, 저거 S자 떼 갈까?"
"저건 왜?"
"저거 떼서 갖고 있으면 서울대 간다더라."
"너 서울대 갈 거야?"
"아.. 아니. 니 말이야. 니 서울대 가야지."
누가 그랬더라. 뉴스에서 본 것 같은데, 소나타에 붙어있는 저 S자 떼어서 가지고 있다가 수능 치면 잘 친다고. 서울대 갈 수 있다고. 미신인 거 아는데 그래도 네 앞 클로버처럼 행운의 상징이 될 수도 있고.
근데 빙고는 입을 가리고 고개를 젖혀 웃기 시작했다. 너 진짜 그걸 믿는다고? 번고는 따라 웃으면서 빙고가 서울대만 갈 수 있다면 더한 것도 할 수 있단 생각을 했다. 요즘 꽤 자주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렇다곤 말 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말이라도 고마워.
웃느라 흔들리는 팔이 번고의 팔에 살짝 닿았다. 웃음으로 약간 떨리는 목소리가 너무 가까워 번고는 아주 잠깐 얼굴을 굳히고 숨을 참았다. 왜 이러지. 왜 이럴까. 하지만 그 생각마저도 감아오는 그 팔에 흩어져버리고 만다. 마른 팔이 번고의 팔에 닿고 번고는 손에 쥔 빙고의 가방끈에 더 힘을 주어 당겼다.
교과서 다 들고 댕기나, 왜 이렇게 무겁노. 낑낑대는 척 붉어진 얼굴을 감춰본다. 이러면 안 되는데, 너 가만 보면 되게 순진한 거 알아? 요새 그걸 누가 믿어.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 때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번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가? 활짝 웃어본다. 심장이 미울 만큼 뛰는 게 느껴진다.
빙고의 아버지는 자갈치와 영도 인근을 주름잡는 깡패 두목이고, 번고의 아버지는 그 바로 밑의 수하였다. 번고의 아버지가 구속이 되면서 처음으로 빙고의 아버지가 번고를 거둬주었다. 그게 몇 달 전이었다.
감방에 수감된 적은 많지만 누군가에게 번고를 맡기는 그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번고는 이번엔 가석방이 좀 어려운가 생각했다. 이미 너무 자주 드나들었고, 그런 생활이 익숙한 번고를 감옥 잠깐 간다고 남의 집에 맡길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며칠 전 면회를 갔을 때 꼭 다신 못 나올 용처럼 같이 살 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강하게 살아야 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와 같은 말을 계속 면회 시간 내내 했던 것도 번고가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였다. 그 때문에 아버지의 수하였던 파워가 다쳐서 깁스를 했다는 것도, 빙고와 잘 지내고 있다는 것도, 서울에 가서 대학을 다녀도 되냐는 말을 하지 못했다.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모든 질문이 무색하게 아부지 언제 나와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찼었으니까. 그 말을 해버렸다면 아버지가 약해지지 말라고 혼 냈을 게 뻔하니까. 그건 죽어도 싫었다.
아버지의 뜻대로 강한 남자로 사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자꾸 푸른색 수의를 입은 아버지를 보면, 그 수의에 붙은 죄수번호를 보면 약해져버리고 만다. 번고는 애써 웃으며 콩 밥 잘 먹고 계세요, 담에 또 올게요. 손을 흔들고 면회실을 빠져 나가버릴 뿐이었다.
빙고는 버스에 타서도 단어장을 보고 있다. 번고는 빙고의 그 무거운 가방을 꼭 끌어안으며 조심조심 티나지 않게 그 옆모습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빙고가 고개를 돌리면 번고는 얼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빙고가 웃음녀서 다시 단어장을 쳐다보면 또 슬그머니 그런 빙고의 옆모습을 봤다.
자꾸 다른 건 안보이고 그런 게 보인다.
너 왜 자꾸 나 그렇게 쳐다봐. 그렇게 예뻐? 단어장에 시선을 내리 꽂고 빙고가 묻는다. 번고가 화들짝 노라서 허둥대며 내 안 쳐다 봤는데? 누가 봐도 당황해하며 말하다가 빙고의 가방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아니, 봐도 되는데 너무 빤히 쳐다보니까 신경 쓰여서 단어가 잘 안 외워지잖아. 번고가 시뻘게진 얼굴로 가방을 주워 올리며 아, 맞나. 아, 안 쳐다볼게. 하고 반대편 창으로 고개를 돌린다.
얄밉게도 옆에서 빙고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빙고와 있으면 이상하게 멍청해지는 것 같다. 학교에선 애들 다 무서워하는데, 깡패 딸내미라고 다 눈만 마주쳐도 피하는데, 감히 놀릴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는데. 아버지들끼리의 서열이 밀려서 그런가. 아니다. 그게 아닌데. 말을 괜히 받아 칠 수가 없다.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로 별 말 못하고 낑낑대다가 그냥 애꿎은 빙고의 무거운 가방만 품에 꼭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