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레임와쳐]
7: 잊혀진 전설의 후손들(3)
그 분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수두룩하게 쌓여 있다. 그럼에도 하나만 고르라면 당연히 이 기억을 고를 것이다.
누군가가 그랬었지.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한 기억 중에서 가장 뜻 깊은 기억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고. 쉽다면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닌 것이라고.
아쉽진 않겠지만 나에 대해선 아닌 것 같다. 그 분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고, 그 분에 대한 기억 중 가장 뜻 깊은 기억을 고르는 것은 쉬었으니까. 어쩌면 저 말을 한 사람과 나는 가장 중요한 사람을 여러모로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기억 외에도 그에 대한 기억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다만 하고 싶지가 않았다. 조금이라도 그에 대해 떠올리면 곧장 트라우마가 밀려오기 때문이다. 동네의 약사는 나의 두통을 보고 고질병이라 쉽게 없어지진 않을 거라 귀에 딱지 얹힐 만큼 자주 말했다.
트라우마 때문에 학교에서 수시로 발작을 하던 저학년 때에도 의사나 약사는 이런 발작은 이유 없는 발작인데, 선천적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며 완치를 할 확률은 적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혀 아니었고 완벽하게 틀려 나가는 그들의 오진엔 나름 타당한 이유들이 숨어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나의 트라우마에 대한 존재를 알고 있지도 않았고, 우리 가족한테 치료비가 있을 리 없단 것도 알 테니 제대로 진료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이 외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었겠지.
어쩌면 방금 떠올린 기억의 파편은 그 분에 대한 완벽한 뜻 깊은 기억은 아닐 것이다. 그에 대해 가장 뜻 깊은 순간은, 당연히도 그 분께서 떠났을 때이다. 나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을 꼽을 수 없었고 편하게 떠올리지도 못 하겠다.
방금의 기억은, 편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떠올렸을 때 힘들지는 않았다. 기억이 천천히 재생이 되도 아프진 않았다. 하지만 그 기억을 떠올리면 재생이 되기도 전에 발작이 시작될 것이다. 물론 실재로 그런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그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으니까.
‘성장’ 이란 말이 있다.
대충 말하면 무언가 내 일상에 영향을 미칠 만큼 슬픈 일이 있고, 그 일이 있을 때 아프지만 상처를 꼬메고 한 칸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한 번 더 변화를 맞이하려면 언제가는 그 기억을 떠올려야 하겠단 것을 알고 있다. 슬픔이 없으면 성장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 날 난 내 인생의 첫 번째로 성장을 맞이했다. 하지만 성장통이란 말이 있듯이 난 그 일 덕에 일곱 살이 채 되기 전에 철이 들었고, 그 후폭풍은 성장통으로 다가왔다.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 성장통은 발작과 트라우마였다.
그리고 아마도 성장통을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한 번 더 성장해버리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난 트라우마를 버리기 위해 한 번 더 성장을 해야 하고, 그 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어떻게 하면 성장할 수 있을지 안다. 그래서, 그 기억을 오랜만에 꺼내 보아야 할 것 같다.
아마도 오늘 뒤로 트라우마가 찾아오는 일은 급격히 줄 것이다. 어쩌면 떠올리면서 두통이 오겠지만,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듯이 한 번 하면 그 다음은 쉽다. 이런 일도 그럴 것이다.
“ 플레이크, 너는 만약 네가 용의 후손이라면 어떨 것 같니? 만약에 네가 혼혈이 아닌 순혈 용이라면? 만약에 네가 그 일을 계승해야 하는 자라면? 그러면 너 어떨 것 같니? 지금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네가 자라도 그럴 것 같기도 해. … 하지만 꼭 그런 법은 없으니. 비록 나도 네가 용의 후손인 걸 바라는 것은 아니란다. 지금의 네가 무슨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전설적인 존재의 피를 이어받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야. 나라고 예외는 아니란다. 네 눈에 내가 강해 보인단 건 알아. 하지만 그런 나라도 내 선조의 힘은 도무지 당해내기 어렵더구나. 가끔은 혼자서 폭주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줄을 놓아 버릴 때가 있어. 그럼에도 후손이란 건 명예로운 일이지. 그 명예가 꼭 옳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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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력하면 중간은 갈 수 있는 대부분의 일들과 달리 용의 후손은 네가 노력해도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너의 심성이 어떻든 야망이 어떻든 피가 이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용의 후손이다. 이름에 계승자, 수호자 같은 거창하고 화려해보이는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 이유지. 왜냐하면 피를 물려받은 것과 선조와 똑같이 명예의 짓을 한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얘기거든. 아무리 어둠 용의 후손이어도 선행을 베풀 수 있고, 빛 용의 후손이어도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는 것이지. 그래서 ‘후손’이란다. 말 그대로 후손이기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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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의 후손은 그리 많지 않아. 모든 용의 후손이 다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이도 많지. 그럼에도 내가 속한 용의 후손들의 장소는, 더 찾으려 노력해. 찾은 이가 누구든, 뭔 짓을 했든, 무슨 용의 후손이든, 그 용의 후손이 존재를 스스로 알든 모르든, 합심하고 싶든 아니든…. 우리가 이런 노력을 하는 이유가 뭔지 아니? 재앙, 아니 전쟁을 막기 위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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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말했던 전쟁이 뭘 의미하는지 말해줄 수는 없어. 그럼에도 네가 그렇게 매달린다면, 힌트는 줄 수 있겠지. 짧게 말해준다면, 제 2의 세기 전쟁이야.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제 2의 용의 혈투, 빛과 어둠의 전쟁이란 말이야. 어떻게 용이 없는데 용들의 전쟁이 이어질 수 있냐고? 용의 후손들이 이어받은 거지. 그들의 전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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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과 어둠의 대전쟁 뒤엔 많은 일들이 있어. 중요한 일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일들도 많지. 아마도 잊혀진 일들도 많을 거야.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말해 주자면, 잊혀진 일들 중 가장 중요한 일은 고대신룡과 다크닉스에 대한 것이겠구나. 그렇게 중요한 일이 어떻게 묻혀졌냐고? 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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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신룡이 스스로를 희생해서 다크닉스를 봉인한 줄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야. 실제로 내가 그렇게 말했고,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니까. 하지만 진짜 결말은 따로 있어. 고대신룡은 다크닉스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지? 실제로도 그렇긴 했어. 하지만 결국 방법을 찾지 못 했고, 둘은 최후의 날에 단 둘이서 만났어. 고대신룡은 어쩔 수 없이 바로 봉인 의식을 시작했고, 다크닉스는 둘 다 봉인당한다면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며 멈출 것이라면 미래로 떠넘기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지. … 고대신룡은 순순히 들어주진 않았지만 결국 동의했고 그들은 전쟁을 떠넘겼어. 후손들에게 말이지. 본인들의 후손. 그 것에 대한 자세한 일은 아무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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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이면 난 떠날 것이다. 마지막까지 함께해주진 못 해서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지막까지 버티기엔 내 목숨이 그리 길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났다. 내가 떠난다면 네가 어떻게 느낄지를 차마 모르겠구나. 사냥 훈련이야 충분하겠지만, 용에 대한 이야기는 더 들려주지 못 하게 되었단다. 너라면 잘 헤쳐나가겠다는 생각도 들긴 하다만, 여전히 걱정되긴 하구나. 슬퍼하진 말거라. 우린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으니까.”
그의 마지막 말 뒤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정확히 그의 말 뒤로 하루 뒤였다. 아직도 내 눈 앞엔 선하다. 그의 시체가 마을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것이.
그의 시체에 보랏빛 날개와 꼬리가 달려 있던 것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