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alons
Ep.3
이슬비
집에 도착하였을 땐 이미 어둠이 살짝씩 걷히고 있는 시간이였다. 그래도 아까 잠을 자 놓았기에 좀 낫겠지 싶었다만 막상 안으로 들어오자 피곤이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차마 새근새근 거리는 릴과 에페르를 치고 지나갈 수는 없어 조금 돌아가기로 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언니…?”
나는 순간적으로 놀라 뒤를 쳐다보았다.
뒤에는 피곤한 듯 눈을 비비고 있는 페트리코와 신난 듯한 메랄이 앉아 있었다. 나는 지금 시간을 대충 가늠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늦게 자면 안 되는데. 왜 아직까지 깨어 있는 거지.
“나 놀아주라. 응?”
“안 돼. 늦었어.”
나는 짧고 단호하게 메랄을 무시한 뒤 그들의 잠자리를 정리해주었다. 누더기가 접혀 있는 걸 보니 뛰어 논 것 같다. 뒤에서 계속해서 메랄이 찡찡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하며 침대를 펴주었다. 페트리코야 얼른 자리에 누워 잠에 빠져드려 했지만 메랄은 여전히 앉아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언니는 왜 나 안 놀아줘?”
“뭐?”
메랄의 목소리는 상당히 퉁명스러웠다. 마치 불만이 가득 쌓인 듯이 짜증난 말투였다. 순간 솓구쳐 오르는 피곤함이 나를 덮치며 욕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메랄 앞이라는 걸 떠올리며 애써 참고는 고개를 돌려 창고를 확인하러 갔다.
“언니. 다른 용들은 다 놀아주는데 왜 언니만 안 놀아줘. 다른 집은 다 놀아주던데. 나 싫어?”
집의 구석에 창고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크기의 금고 앞에서 문을 열기 전에 훅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꾸했다.
“너 싫었으면 왜 이러고 살아.”
“그럼? 나 싫어서 나 무시하는 거잖아. 에페르 오빠가 그랬어. 언니 관심 없다고. 그래서 맨날 나갔다 오는 거잖아.”
“…”
나는 금고의 문을 잡고 잠시 입을 닫았다.
아까의 그 노동이 떠올라 손이 저릿해지는 게 느껴졌다. 부싯돌로 불을 피고 페어에 같다 팔고 소분해서 들고 오고 약초를 말리고 바느질을 하고… 드리프트와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온갖 일을 다 하는 동안 메랄은 뭐를 했을까? 집에서 페트리코와 놀았겠지. 아니면 내가 나흘 전에 만든 묽은 양배추 수프를 마시면서 잤을 것이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일을 도와준 적 없이 말이다.
물론 메랄은 어리다. 릴도 나와 네 살 차이지만 메랄은 나와 여섯 살 차이다. 그러니까, 아직 열 살이라는 것이다. 내가 열 살 때 난 뭐를 했던가. 드리프트와 그때도 같이 이렇게 일했을까? 한 번도 놀지 않고? 나는 희미한 기억을 천천히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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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지막으로 쉰 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하루라도 쉬면 가족이 굶어죽는다. 드리프트가 도저히 혼자서는 버티지 못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매일 일터에 나가서, 산에서 밤샘을 하면서까지 식량을 구해오는 것 아닌가. 나야 산에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난 애초에 자연을 좋아하니까. 사냥도 그럭저럭 잘하고 나름 꼼수도 많이 생겨서, 오히려 지금 이 집에서 지내는 것보다 더 풍족하게 살 수 있지도 모른다.
왜냐햐면, 나누지 않아도 될 테니까.
지금은 넷과 나누어서 반쪽이라도 더 주기 위해 나눠야 한다지만 야생에서는 그저 남이다. 누굴 위해 인생을 바쳐가며 살 필요도, 어디에 묶여서 살 필요도, 가난에 찌들어 살 필요도 없다. 그냥 강 흐르듯이, 주변 배경에 섞여들어서 생태계의 일원이 되면 된다. 그렇게 편하게 살 수도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산에 나간 것은 아빠가 처음 돌아가셨을 때였다. 가을 바람으로 불씨가 튀는 바람에 난 산불은, 우리 아빠 말고도 드리프트의 아빠도 같이 무지개를 건너게 만들었다. 그 뒤로는 더 낳아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드리프트의 엄마가 실종당하시고 난 뒤로 우리 엄마는 우울증에 걸리셨다. 그러다가 엄마는 자살이라는, 편한 길을 선택해버리고 말았다.
자살은, 풍족한 이들이 보면 불쌍하다고 여길 만하거나 슬픈 불의의 사건으로 생각되곤 한다. 난 그런 것이 너무 싫다. 자살이 가장 이기적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누굴 먹여살려야 하는 경험이 없으니까. 자살을 고르면 쉽게 떠날 수 있다. 그 책임감과 사명감에서 도망칠 수 있다. 한 번에.
나는 내가 가족을 돌봐야 하는 이유를 지난 9년간 찾지 못 했다. 여전히 소중한 이들이고 먹여살려야 하는 이들이고 없으면 안 될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나 혼자 만족하면서 살아보고도 싶다. 한 번쯤은 도망쳐 보고 싶다. 어릴 적에, 릴이 태어나기 전에는 우리 가족도 행복했던 적이 있다, 그리 믿으면서 다시 그 시절로 가려면 내가 몸을 갈아야 한다고밖에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주변인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먹여살리는 일상은 대부분의 이들에겐 당연한 하루하루가 되었고, 그들은 내 위치로 오고 싶어 하지도, 왜 와야 하는지도, 올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른 이들을 위해 배푸는 걸 싫어한다. 누군가에게 내가 배풀면 우리가 굶기 때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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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방금까지 메랄이 뭔가를 계속 말했단 걸 난 그제서야 알아채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언니, 울어?”
“아니. 안 울어.”
말을 담담하게 하려곤 하는데 목이 맥혀서 말이 잘 나오지가 않았다. 난 그런 걸 애써 숨기려고 식량 참고를 확인하는 척 문을 연 뒤 기웃거려보았다. 메랄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알았어. 나 자?“
메랄의 말투는 아까와는 사뭇 달랐지만 정작 이 말투가 무얼 의미하는지는 잘 알아채지 못 할 것 같았다. 나는 고된 일상 속에서 현실 감각은 커졌지만 감정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지 못 하는 부분이 종종 많이 있었기에, 메랄도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며 자라고 손짓을 해주었다.
“나 배고픈데.”
“뭐?”
돌아온 답변은 실망한 것이 확연히 들어나는 짤막한 두 마디였다. 그러고 보니까 그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그런가 아까부터 자꾸만 딴 생각이 들어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나는 최대한 초점을 맞추며 금고 안으로 확인해보았다.
어느새 양배추 수프는 다 떨어져 있었고 그 냄비는 드러워져 있었다. 나는 한숨이 푹 나오는 것을 막지는 못 하며 뒤쪽을 더 살펴보았다.
남은 식량, 말린 빵 반 조각, 오트밀 서너 다발. 그리고 이제 곧 채워넣을 치즈와 버터 반 조각.
“먹을 거 없는데…”
나는 메랄에겐 닫지 않을 정도로 살짝 중얼거리며 금고를 뒤져보았다. 뭐가 항상 휑하니 보이는 것은 공통점이었고, 차이점은 얼마나 더 비워져 있나 정도였다. 여기서 뭔가를 더 주면 내일 아침은 어쩌지.
“빵 줄까?”
“응, 언니.”
나는 말린 빵 반 조각을 다시 반으로 부순 뒤 메랄에게 건냈다. 메랄이 천천히 빵을 씹으며 구석으로 들어가자 나는 지친 한숨을 내쉬며 어느새 새벽빛이 군데군데 들어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계곡에서 빨래를 한 옷가지들도 정리해야 했다. 또 몇 개는 찢어져서 바느질도 해야 하는데….
머리가 띵할 정도로 피곤해서 일어나는데도 한참이 걸렸지만 차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잘 순 없어서 서랍에서 천 몇 조각과 실, 바늘을 꺼낸 후 바깥으로 나갔다. 천천히 나를 덮치는 햇빛이 새벽 공기를 뚫고 나의 비늘을 밝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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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졸면서 바느질과 마른 옷을 갠 뒤 밖을 보았을 때는 이미 해가 뜬 지도 좀 지난 시간이었다. 벌써 아침 6시라는 생각이 머리를 강타하자 드는 생각은, 늦었다, 는 것이었다. 드리프트와 적어도 30분 이내에 만나려면 아침 준비도 제대로 못 하는 수가 있었다. 그가 오늘만이라도 조금 늦게 나오길 빌며 나는 황급히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침을 준비할 여유가 없어 나는 그냥 남은 말린 빵과 어제 가지고 온 치즈, 버터 반 조각을 올려놓고 그대로 뛰쳐 나갔다.
상당히 차가운 공기 사이로 천천히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늘을 타고 내려오는 시원한 촉감과 함께 활대에 물이 매치는 듯한 기분이 들어 묘했다. 나는 만날 장소를 생각하며 발걸음을 빨리 하려 노력했다. 졸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그래도 참을 만한 시간이라고 속으로 되뇌이며 레빈의 끝자락에 도착하였다. 원래라면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야 만날 장소지만, 웬일로 드리프트가 나와 있었다.
그의 표정은 상당히 초조해보였고 한쪽 팔 뒤에는 나무판떼기로 보이는 조각 네다섯개가 거추장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끝